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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욱 저작권썰.zip]㊱ ‘법대로 해!’만으로는 지켜지지 않는 콘텐츠 저작권 분쟁의 현실

일상생활에서 분쟁이 생겨 결론이 나지 않는 경우, 결국 약속이라도 한 듯 ‘법대로 해!’라고 외치게 됩니다. 저작권 분쟁도 다르지 않습니다. 침해가 있다면 제재되어야 하고, 정당한 권리자는 보호받아야 합니다. 문제는 권리 보호의 필요성 그 자체가 아니라, 이를 실현하는 방식과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오남용에 있습니다.일반적인 재산권 분쟁은 일정 부분 금전적 배상으로 어느 정도 사후 회복이 가능하지만, 콘텐츠 산업은 다른 민사분쟁과 그 결을 달리합니다. 공개 시점과 유통 타이밍, 화제성이 가치 형성의 핵심인 콘텐츠 특성상, 유통이 막히거나 시기를 놓치는 것은 곧 시장 퇴출을 의미합니다. 또한 분쟁 사실이 알려지는 경우 여론은 민감하게 움직이고, 그 여론이 작품의 생명력을 좌우하기도 합니다.◇ 법적조치, 가처분의 허와 실바로 그 특수성 때문에 콘텐츠 분쟁에서 가장 예민하게 다뤄지는 법적 수단이 가처분입니다. 본안 판결 전 가장 빠르고 직접적인 효과를 내는 가처분은, 상대방의 이용을 즉각 중단시키는 가장 강력한 압박 수단으로 동원되곤 합니다. 본래 가처분은 본안 판결 전까지 권리를 보호하기 위한 예외적이고 잠정적인 조치여야 합니다. 그러나 콘텐츠 산업에서 가처분의 효력은 너무 강하게 작용합니다.이는 실제 사례에서도 발견됩니다.2020년 방영된 한 드라마에서는 특정 악곡이 극중 인물들의 잃어버린 가족 관계를 암시하는 핵심적인 정서적 매개체로 사용되며 시청자들의 눈물샘을 자극했습니다. 등장인물들은 과거를 회상하며 해당 곡을 가창하거나, 기타 연주를 곁들여 부르는 등으로 작품 전체의 감정선을 극대화했습니다.하지만 해당 악곡의 저작권 지분을 상속받은 2인 중 1인은, 자신의 개별적 허락 없이 악곡이 활용된 것이 저작권 침해에 해당한다고 주장하며, 방송사와 제작사를 채무자로 하여 ‘저작권침해금지 가처분 신청’을 제기하기에 이릅니다.이 분쟁의 타임라인을 살펴보면, 드라마 방영 중이던 2020년 6월에 가처분 신청이 접수됐으나 작품은 그해 9월에 이미 종영됐습니다. 1심 판결은 종영 3개월 후인 2020년 12월에야 내려졌고, 이후 진행된 항고심 판단은 종영 후 2년이 지난 2022년 10월에서야 확정됐습니다.이후 2023년 3월 대법원의 심리불속행 기각과 12월 소송비용액 확정을 거치면서, 해당 사건은 가처분 1심과 항고심 사이에만 약 2년의 시간이 지나서야 비로소 최종 마무리됐습니다. 방영과 유통, 소비가 실시간으로 이루어지는 콘텐츠 산업에서 이 시간은 단순한 사법 절차 지연을 넘어 사실상 콘텐츠의 시장성 소멸을 의미합니다.사건의 결론은 명확합니다. 1심 법원은 가처분 신청을 기각하며 소송비용을 채권자(신청인)가 부담하도록 판결했습니다. 이어진 항고심 역시 추가 및 확장된 신청을 모두 기각하고, 항고 제기 이후의 비용 또한 채권자(항고인)가 부담하게 했습니다. 이후 대법원의 심리불속행 기각과 방송사·제작사의 신청에 따른 소송비용액 확정 절차가 인용되면서 사건은 최종 종결됐습니다.결과적으로 법원은 가처분을 신청한 상속인의 사용중지 요구를 모든 심급에서 받아들이지 않은 셈입니다. 사후적으로 평가했을 때, 작품의 이용 중단까지 요구했던 이번 가처분 신청은 법률적 정당성을 인정받기 어려운 무리한 주장이었음이 확인된 사례라 할 수 있습니다.◇ 권리보호의 방패 vs 콘텐츠 생명력의 치명타이 사건처럼 권리 침해 의심만으로 작품 전체의 유통을 중단시키는 강력한 금지 조치가 실제 허용됐을 경우, 가처분이 잠정적 보전 처분을 넘어 선제적 제재 수단으로 변질되며 콘텐츠로서는 치명타가 될 수 있습니다.설령 본안 소송에서 최종 패소하더라도, 그 사이 작품 방영은 종료되고 투자금 집행과 해외 판매, 플랫폼 노출 등의 결정적 시점은 이미 지나가 버립니다. 이러한 콘텐츠 시장의 특성상, 가처분은 정당한 권리를 보호하는 방패가 될 수도 있지만, 잘못 행사될 경우 콘텐츠의 생명력을 뿌리째 흔드는 파괴적 수단이 될 수도 있습니다.이 사건의 항고심 결정문에 따르면, 실제로 신청인(항고인)은 작곡가의 상속인으로서 권리를 주장하며, 드라마 속 음악 이용 부분의 제거와 서비스 중단, 즉 다시보기 서비스, 국내외 동영상 제공, OTT 및 스트리밍 플랫폼 이용 제한, 파일 회수·폐기까지 폭넓게 청구했습니다. 이러한 리스크로 인해 필자가 수행해 온 글로벌 플랫폼의 콘텐츠 저작권 클리어런스(Clearance) 실무에서는 권리 확보 단계에서부터 권리자의 구제수단을 금전적 손해배상으로 제한하는 조항을 요청받곤 합니다. 설령 계약 위반이나 침해 의심이 있더라도 계약 해지, 사용허락 철회, 방영금지 가처분 등의 금지명령으로 작품 이용 자체를 중단시키지 못하도록 하고, 사후 금전 배상으로만 해결하도록 제한하는 것입니다.이는 권리자의 권익을 경시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권리 보호가 중요하기 때문에 그 방식 또한 산업의 속도와 회복 가능성을 균형 있게 고려해야 하며, 콘텐츠 산업에서의 가처분은 자칫 작품 전체의 생명력을 먼저 끊어버릴 수 있다는 점을 반영한 합리적 조치라 할 수 있습니다.문제의 핵심은 가처분 제도 자체가 아니라, 콘텐츠 유통의 전면 중단을 쉽게 허용하는 운용 원리와 명확한 기준의 부재에 있습니다. 가처분은 회복 불가능한 손해가 예상되는 경우에만 극히 예외적으로 인용돼야 하며, 본안 소송은 지금보다 훨씬 신속하게 진행돼야 합니다. 가처분 조치 후 몇 년 뒤 결과가 바뀌는 경우, 이미 작품의 화제성과 시장 가치가 회복 불가능한 상태가 된다면 그 승소 판결은 너무 늦은 결과일 뿐입니다.동시에 산업 현장의 계약 단계에서는 라이선스 범위, 각색과 편곡의 한계, 2차적 활용 가능성, 크레딧 표기 및 대가 지급 기준을 보다 정교하게 명문화해야 합니다. 그리고 사후적으로는 조정, 중재, 손해배상 중심의 실효적 구제수단이 보다 적극적으로 활용될 필요가 있습니다.콘텐츠 산업에서 가처분을 전가의 보도처럼 꺼내드는 구조는 권리 보호와 산업의 지속 가능성 모두를 저해합니다. 권리를 지키는 일과 콘텐츠를 살리는 일, 두 가지 모두를 동시에 가능케 합리적인 제도와 계약 구조를 만드는 것, 그것이 지금 우리 콘텐츠 산업이 풀어야 할 가장 시급하고도 현실적인 과제입니다.김지욱 ㈜메이저세븐이엔엠 대표 ▶ 저자소개=서강대학교 언론대학원 석사. 현재 (주)메이저세븐이엔엠의 대표로 음악 저작권과 콘텐츠 현장에서의 음악 저작권 관련 업무 및 자문 활동을 활발히 펼치고 있다. JTBC ‘싱어게인’, 넷플릭스 ‘은중과 상연’, tvN ‘태풍상사’, ‘폭군의 셰프’, SBS ‘우리들의 발라드’, Mnet ‘보이즈플래닛’ 등 다수 프로그램 및 콘텐츠의 음악 저작권 관리 업무를 맡아오고 있다. 2026.04.06 0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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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욱 저작권썰.zip]㉟ ‘신이랑 법률사무소’ 속 저작권의 비극

망자의 한(恨)을 통쾌하게 풀어 주는 ‘신들린 변호사’ 신이랑과 승소에 모든 것을 건 ‘냉혈 엘리트 변호사’ 한나현의 기묘하고도 따뜻한 한풀이 어드벤처, SBS 금토드라마 ‘신이랑 법률사무소’가 화제입니다.지난 21일 방영된 4화에서는 걸그룹 연습생 수아의 죽음을 둘러싼 아이돌 세계의 경쟁과 질투, 배신과 반전, 그리고 살인사건의 진범을 추적하는 범죄 서스펜스같은 긴박한 이야기가 펼쳐졌습니다. 이 이야기가 흥미로운 것은, 단순히 ‘누가 수아를 죽였는가’라는 범인의 실체를 밝히는 데 그치지 않고 그 이면에 숨겨진 저작권의 비극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는 데 있습니다. 아직 세상에 공개되지 않은 자작곡이 어떻게 타인의 손에 넘어가고, 그 과정에서 진짜 창작자의 이름이 어떻게 지워질 수 있는지 사건 그 이상의 서늘한 여운을 남깁니다.극중 신이랑(유연석)은 수아(오예주)가 죽던 날 들었던 휴대전화 벨소리의 주인이 글로리 엔터의 작곡가 고종석(정시헌)이라는 사실을 알아냅니다. 이후 수아의 영혼과 함께 그의 집에 들어간 신이랑은, 고종석이 수아의 휴대전화에 담긴 가사와 자작곡을 몰래 들여다보며 자신의 곡처럼 활용하려는 장면을 목격하게 됩니다. 고종석은 그 곡의 가치를 알아챈 뒤, 수아의 곡을 자신의 곡으로 둔갑하여 세상에 발표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기 때문입니다.당초 이 사건은 표절시비가 끊이지 않던 작곡가 고종석이 연습생(수아)의 미발표곡에 탐을 내 저지른 살인사건으로 보였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반전은 진범이자 공범이 수아의 가장 가까웠던 연습생 동기 엠마(천영민)였다는 점입니다. 수아의 자작곡을 가장 먼저 듣고 그 노래의 가치를 알아본 엠마는, 수아를 속여 곡을 보내달라고 한 후 자신의 곡처럼 고종석에게 들려주었고, 데뷔조 탈락의 공포 앞에서 수아를 경쟁자이자 장애물로 여겨 끝내 살인까지 저지릅니다.범행을 목격한 고종석이 신고하려 하자, 엠마는 오히려 고종석이 연습생의 자작곡이 탐나서 살인을 저질렀다고 뒤집어 씌우겠다는 협박으로 사건을 은폐시킵니다. 결국 두 사람은 공모하여 수아의 휴대전화와 자작곡을 통째로 가로챕니다. 이로써 사건은 단순히 ‘누가 수아를 죽였는가’의 문제에만 머물지 않게 됩니다.◇저작권은 언제부터 발생되나현실에서는 아직 발표되지 않았거나 저작권협회에 등록되지 않으면 저작권이 발생하지 않아 법적 보호를 받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저작권은 특허처럼 등록으로 생겨나는 권리가 아닙니다. 창작적 표현이 구체적인 형태를 갖추는 순간, 원칙적으로 저작권이 발생하게 됩니다. 저작권 등록은 권리를 새롭게 만들어내는 문이 아니라, 분쟁이 벌어졌을 때 누가 언제 무엇을 창작했는지를 보다 쉽게 증명하기 위한 장치에 가깝습니다.이 점에서 수아의 휴대전화는 단순한 소지품 그 이상입니다. 그 안에 남겨진 가사와 음성 메모 속 멜로디, 미완성 데모 파일이 비록 미공표된 저작물이지만, 아이디어를 넘어 표현의 형태로 구체화되었다면 이미 저작권 보호의 대상이 되기 때문입니다. 즉 수아의 휴대전화 속 기록은 단순한 흔적이 아니라, ‘누가 이 노래를 만들었는가’를 증명하는 가장 직접적인 창작의 이력서입니다.◇저작권 침해: 표절보다 잔인한 창작자 존재의 삭제이 사건이 유독 잔인한 이유는 단순히 ‘표절’이라는 저작권 침해를 넘어, 작품에서 진짜 창작자의 존재 자체를 지우려 했다는 데 있습니다.저작권법이 저작인격권 중 하나인 ‘성명표시권’을 보장하는 이유는 분명합니다. 작품은 단순한 재산이기 이전에, 창작자의 생각과 감정, 시간과 삶이 투영된 인격의 표현이기에 저작자가 자신의 실명이나 예명을 표시할 권리를 보장하는 것입니다. 고종석과 엠마가 노린 것은 단순한 멜로디 몇 마디가 아니라 그 노래 속에 새겨진 ‘수아’라는 존재 자체를 훔치려 한 것입니다.◇ 저작권, 돈의 권리이기 전에 ‘이름의 권리’저작권을 말할 때 우리는 종종 저작권료, 수익배분, 인세와 같은 ‘돈의 언어’부터 떠올립니다. 물론 경제적 가치도 중요하지만, 창작자에게 저작권은 단지 수입원 그 이상입니다. 그것은 자신의 작품을 언제, 어떤 이름과 모습으로 세상에 내놓을지 결정할 권리이기 때문입니다.특히 미발표 저작물에서는 ‘공표권’이 중요합니다. 아직 공개되지 않은 노래라면, 그 노래를 언제 어떤 형식으로 세상에 내놓을지 정할 사람은 원칙적으로 창작자 자신입니다. 누군가 그 노래를 몰래 발표하거나 타인의 이름으로 공개하는 것은 단순한 무단이용을 넘어, 저작자의 시간과 이름을 가로채는 일과 같습니다.◇저작자 사망 뒤 미공표 저작물은 누가 공개할 수 있을까그렇다면 수아처럼 저작자가 사망하고 노래가 공표되지 않은 경우, 누가 이 곡을 세상에 내놓을 수 있을까요? 흔히 상속자가 그 권한을 그대로 물려받는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저작권의 문제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습니다.저작권 중 재산권은 사후 70년간 존속하며 상속되지만, 인격권은 저작자 개인에게 귀속되는 권리여서 그대로 상속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 문제는 단순히 ‘공표권을 누가 물려받았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상속된 저작재산권의 행사와 저작자의 사후 인격적 이익 보호를 조화시킬 것인가의 문제로 접근해야 합니다.저작권법은 저작자 사후에도, 생전의 저작인격권이 침해될 만한 행위를 금지하고 있습니다. 유족이나 유언집행자는 침해 행위의 정지나 명예회복에 필요한 조치를 청구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저작자가 사망했다고 해서 그의 인격적 권리가 법적으로 완전히 소멸되는 것은 아니라는 뜻입니다.이런 관점에서 고종석과 엠마가 수아의 곡을 제멋대로 발표하려고 한 시도는, 수아가 생존해있었다면 자신이 결정했어야 할 공개의 시점과 방식, 그리고 자신의 이름으로 세상에 나갈 권리를 타인이 가로채려 한 잔인한 범죄인 것입니다.◇ 저작권, 돈의 권리이기 전에 ‘존재의 권리’‘신이랑 법률사무소’ 4회를 저작권의 시각으로 다시 보면, 한 사람을 추락시킨 물리적 폭력 너머로 한 사람의 창작을 밀어내고 그 자리에 타인의 이름을 남기려 한 또 하나의 폭력이 공존합니다. 수아를 옥상 아래로 떠민 손과, 수아의 노래에서 수아의 이름을 밀어내려 한 손. 하나는 생명을 지우고, 다른 하나는 존재를 지우려 했기에 더욱 섬뜩합니다.창작물이 한 사람의 시간과 감정 등 다양한 삶의 흔적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저작권은 ‘돈의 권리’이기 이전에 ‘존재의 권리’입니다. 창작의 출처보다 자본의 힘을, 진실한 이름보다 유명한 이름으로 창작자를 지운 채 작품만 소비하는 사회라면, 그 사회는 결국 문화의 이름으로 사람을 소모하는 사회일 수밖에 없습니다.김지욱 ㈜메이저세븐이엔엠 대표 ▶ 저자소개=서강대학교 언론대학원 석사. 현재 (주)메이저세븐이엔엠의 대표로 음악 저작권과 콘텐츠 현장에서의 음악 저작권 관련 업무 및 자문 활동을 활발히 펼치고 있다. JTBC ‘싱어게인’, 넷플릭스 ‘은중과 상연’, tvN ‘태풍상사’, ‘폭군의 셰프’, SBS ‘우리들의 발라드’, Mnet ‘보이즈플래닛’ 등 다수 프로그램 및 콘텐츠의 음악 저작권 관리 업무를 맡아오고 있다. 2026.03.30 05:45
연예일반

건담의 소년과 프리렌의 용사..시대를 관통한 주제의식: 영웅의 조건 [노종언 컬처인컬처]

대중문화 속 ‘영웅’은 시대정신을 반영하는 거울이다. 과거의 영웅은 절대적인 힘을 쥐고 악을 물리치는 신적인 존재였다. 하지만 고도로 복잡해진 현대 사회에서 이러한 초인은 더 이상 우리의 팍팍한 현실에 온전한 공감을 주지 못한다.애니메이션 역사를 살펴보면 40여 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서로 맞닿아 있는 두 명의 영웅이 있다. 1979년 일본 애니메이션의 판도를 바꾼 ‘기동전사 건담’의 주인공 아무로 레이와 최근 일본 애니메이션 팬들 사이에 신드롬을 일으킨 ‘장송의 프리렌’의 용사 힘멜이다. ‘SF 메카물’과 ‘정통 판타지’라는 장르적 형태는 다르지만, 두 작품은 우리에게 동일하고도 무게있는 질문을 던진다. 진정한 영웅이란 과연 무엇인가.‘기동전사 건담’은 절대선과 절대악이 싸우는 기존 슈퍼 로봇물의 공식을 완전히 파괴했다. 주인공 아무로 레이는 세상을 구원하겠다는 숭고한 사명감이 아니라, 그저 죽지 않기 위해 발버둥 치며 로봇에 탑승한 내향적인 소년이었다. 어른들의 이기심이 만든 전쟁에 예고 없이 내던져진 그는, 병기의 압도적인 힘에 짓눌리고 살인에 대한 죄책감에 구토한다. 전장에서 각성한 ‘뉴타입’이라는 능력은 더욱 비극적이다. 타인과 깊이 교감하고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이 능력은, 적의 슬픔과 고독마저 여과 없이 흡수하게 만들었다. 내가 완벽히 이해한 상대를 내 손으로 죽여야만 하는 모순. 1970년대 후반, 유례없는 고도성장의 이면에서 하나의 부품처럼 소모되며 허무주의에 빠져있던 청년들은 폭력의 시대 속에서도 타인과 교감하려 고뇌했던 이 연약한 소년에게서 자신들의 모습을 투영했다.그로부터 40여 년이 흐른 2020년대. ‘장송의 프리렌’이 그리는 세계는 거창한 스펙터클 대신 잔잔한 여운으로 가득하다. 극 중 마왕을 물리친 위대한 용사 힘멜은, 놀랍게도 세상을 구원할 자만이 뽑을 수 있다는 ‘용사의 검’의 선택을 받지 못한 ‘가짜 용사’였다. 힘멜의 진짜 무기는 화려한 검술이 아니었다. 동료들이 길을 잃거나 두려움에 떨 때 언제나 뒤돌아보며 안심시키는 다정한 소통과, 곤경에 처한 이웃을 지나치지 않는 작은 선의였다. 최근 젊은 세대 사이에서는 “용사 힘멜이라면 그렇게 했을 테니까”라는 극중 프리렌의 대사가 유행어처럼 번지고 있다. 귀찮거나 이기적인 선택을 하고 싶을 때, 스스로 제동을 거는 하나의 따뜻한 윤리적 나침반이 된 것이다.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에는 마왕도, 우주 전쟁도 없다. 하지만 일상 속에서 타인의 아픔에 공감하고 작은 수고를 감수하는 마음, 평범하지만 다정한 소통과 선의가 모일 때 우리는 서로의 삶을 구원할 수 있다그것이 바로 40년의 시간을 관통하여 건담의 소년과 프리렌의 용사가 우리에게 남긴, 시대를 초월한 진짜 영웅의 가치다.노종언 변호사 (법무법인 존재) ▶저자 소개=노종언 변호사는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을 졸업하고 사법시험 합격 후 현재 법무법인 존재의 대표변호사로 재직 중입니다. ‘컬처인컬처’(Culture in Culture)는 문화 속에 숨겨진 또 다른 문화를 성찰해 그 연결 고리를 소개할 예정입니다. 2026.03.27 06:00
연예일반

완벽한 피해자만 살아남는 잔혹한 무대..‘피해자 비난’의 구조적 비극 [노종언 엔터법정]

스마트폰과 SNS가 일상이 된 요즘, 우리는 매일 수많은 사건 사고 뉴스를 접한다. 그러나 유독 유명 연예인이나 인플루언서가 범죄의 피해자가 되었을 때, 우리 사회의 시선은 기이할 정도로 비틀린다. 대중은 가해자의 범죄를 비판하기보다 “왜 하필 그 시간에 거기에 있었느냐”, “평소 행실이 어땠느냐”며 오히려 피해자에게 원인을 돌리곤 한다. 이른바 ‘피해자 비난(Victim Blaming)’ 현상이다.연예인은 대중의 사랑과 부를 누리는 부러움의 대상이지만, 동시에 사이버블링이나 스토킹 같은 범죄에 노출되었을 때 가장 잔인한 2차 가해를 견뎌야 하는 모순적인 위치에 있다. 이들을 향한 집단적인 비난은 단순한 호기심이나 우발적인 악플이 아니다. 이는 인간의 심리적 방어 기제, 한국 사회의 잣대, 그리고 법의 사각지대가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만들어낸 거대한 폭력이다.심리학에는 ‘공정한 세상 가설’이라는 이론이 있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혼란을 싫어하며, 이 세상이 합리적이고 공정하게 돌아간다고 믿고 싶어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무고한 유명인이 끔찍한 범죄를 당하는 부조리한 상황을 보면, 사람들은 마음속의 불안감을 덜어내기 위해 “피해자에게도 뭔가 그럴 만한 이유나 잘못이 있었을 것”이라며 억지로 상황을 합리화하고 피해자를 깎아내리곤 한다.특히 한국 사회는 개인의 ‘도덕성’과 ‘능력’을 하나로 묶어서 평가하는 경향이 강하다. 서구권에서는 유명인의 사생활 논란과 직업적 능력을 분리해서 보는 편이지만, 한국에서는 다르다. 피해자가 대중이 기대하는 ‘흠집 하나 없이 완벽하고 순결한 피해자의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면, 즉각 연민을 거두고 등을 돌린다. 명백한 범죄 사건 앞에서도 가해자의 폭력성보다 피해자의 과거 행실이나 태도가 더 가혹한 비판의 도마에 오르는 이유다.여기에 수사기관의 잘못된 관행까지 더해지면 비극은 걷잡을 수 없이 커진다. 고(故) 이선균의 죽음은 사법기관과 언론, 그리고 사이버 렉카가 만들어낸 ‘사회적 타살’의 전형이다. 내사 단계부터 수사 정보가 유출되어 범죄 혐의를 차분히 다루어야 할 수사 절차는 본질과 무관한 사생활 생중계와 잔혹한 여론재판으로 변질됐다. 연예인을 향한 피해자 비난이 남기는 가장 끔찍한 해악은, 비슷한 상황을 겪는 평범한 피해자들을 위축시켜 입을 닫게 만드는 ‘침묵 효과’를 가져온다는 점이다. 막강한 자본과 소속사의 보호를 받는 연예인조차 무자비하게 난도질당하고 마녀사냥을 당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직장 내 괴롭힘이나 성범죄 등에 노출된 비연예인 피해자들은 세상에 목소리 내기를 포기해 버리기 쉽게 된다.어떤 범죄든 그 책임과 원인은 오직 가해자의 잘못된 의도와 폭력성에 있을 뿐이다. 어둠 속에서 힘겹게 용기를 내어 입을 연 피해자에게 “왜 그곳에 있었느냐”, “왜 이제 와서 떠드느냐”고 묻는 것은 가해자의 칼을 대신 쥐어주는 잔혹한 폭력이자 왜곡된 권력이다. 누구도 완벽한 피해자일 수도 없고, 그럴 필요 역시 없다. 상처입은 자가 온전히 보호받을 수 있을 때, 우리 사회의 진정한 인간적 진보도 비로소 시작될 수 있다.노종언 변호사(법무법인 존재)▶저자 소개=노종언 변호사는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을 졸업하고 사법시험 합격 후 현재 법무법인 존재의 대표변호사로 재직 중입니다. 구하라,박수홍, 오메가엑스, 선우은숙 사건 등 굵직한 연예계 분쟁을 수행한 엔터테인먼트 분쟁 전문가입니다. 다수의 사건을 수행하며 얻은 현장의 경험을 바탕으로, 엔터테인먼트 법률 이슈에 대한 심도 있는 통찰을 제공합니다. 2026.03.20 06:00
영화

‘왕사남’으로 바라본 우리의 이야기..왜 우리는 단종의 이야기에 위로받는가 [노종언 컬처인컬처]

최근 장항준 감독의 영화 ‘왕과 사는 남자(이하 왕사남)’가 누적 관객 수 1200만 명을 돌파하며 한국 영화계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고 있다. 영화는 숙부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강원도 영월로 유배된 단종(박지훈)과 그를 보듬는 촌장 엄흥도(유해진) 및 마을 사람들의 연대를 다룬다. 역사적 패배자의 쓸쓸한 최후를 조명한 이 작품이 대중의 압도적인 공감을 얻는 현상은, 단종이 겪은 좌절과 고립이 치열한 경쟁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보편적 정서와 깊이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역사는 주로 승자의 관점에서 기록된다. 단종은 정통성을 지녔음에도 거대한 권력의 논리 앞에 삶의 터전을 잃고 쫒겨난 대표적인 패배자다. 극중 단종을 벼랑 끝으로 몰아넣은 실질적인 권력 한명회는 오직 승리와 이익만을 좇는 무자비한 기성 시스템 그 자체를 상징한다. 현대 사회의 구조적 현실 역시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개인의 성실함이나 정당한 자격에도 불구하고 자본과 시스템의 냉혹한 논리 앞에서 밀려나는 사람들이 무수히 존재한다. 벼랑 끝으로 내몰린 청년층과 소외계층은 구조적 무력감 속에서 스스로를 영월로 유배된 단종에 투영한다.그러나 이 영화가 관객에게 깊은 위안을 주는 진짜 이유는 단종의 비극 그 자체가 아니라, 유배지에서 그를 대하는 주변인들의 태도에 있다. 촌장 엄흥도와 마을 사람들은 승자독식을 대변하는 한명회의 비정한 논리와 완벽한 대비를 이룬다. 그들은 힘을 잃고 추락한 왕을 조롱하거나 멸시하지 않는다. 오히려 아무런 힘도 없는 그의 상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묵묵히 곁을 내어주며, 종국에는 목숨을 걸고 시신을 수습한다. 현실에서 개인의 실패가 종종 무능이나 노력 부족 탓으로 치부되며 조롱받는 냉소적인 사회 분위기와 대조되는 지점이다.분쟁을 다루는 법조 현장에서도 사회 시스템이 승자에게는 관대하고 패자에게는 냉혹하게 작동하는 것을 빈번하게 목격한다. 승소와 패소, 성공과 실패라는 이분법적 결과만으로 개인의 가치를 재단하는 사회는 필연적으로 각자도생의 각박한 환경을 만든다. 승자의 성취만을 추앙하는 것만으로는 결코 사회가 진일보할 수 없다. 인간의 진정한 진보는 우리의 공동체가 패배한 자의 상처를 어떻게 다루느냐에 달려 있다.단종의 서사는 과거의 기록에 머물지 않는 현재 우리의 이야기를 대변한다. 세상은 끊임없이 새로운 승자를 만들어내고, 우리 역시 언제든 단종처럼 밀려나는 위치에 설 수 있다. 이 영화에 수많은 우리가 공감한 것처럼,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 강력한 승자가 아니라 타인의 실패를 가벼이 평가하는 시선을 거두고 패배의 상처를 온전히 껴안는 사회적 토양이다.노종언 변호사 (법무법인 존재) ▶저자 소개=노종언 변호사는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을 졸업하고 사법시험 합격 후 현재 법무법인 존재의 대표변호사로 재직 중입니다. ‘컬처인컬처’(Culture in Culture)는 문화 속에 숨겨진 또 다른 문화를 성찰해 그 연결 고리를 소개할 예정입니다. 2026.03.13 06:05
연예일반

글로벌 스탠더드로 본 K팝 레이블의 문제점과 발전 방향 [노종언 엔터법정]

한국의 대중음악 산업은 1인 프로듀서 중심의 중소 기획사 모델을 넘어, 거대 자본과 인프라를 결합한 글로벌 기업 모델로 비약적인 성장을 이뤘다. 단일 아티스트에게 집중되는 리스크를 분산하고 지속 가능한 성장을 도모하기 위해 대형 기획사들이 ‘레이블’ 체제를 도입한 것은 K팝을 글로벌하게 자리잡는데 지대한 공헌을 하고 있다.하지만 현재 K팝 산업의 거버넌스는 최근 하이브와 민희진 어도어 전 대표(현 오케이 레코즈 대표) 간의 갈등을 통해 그 문제점을 드러냈다. 이 사태는 단순한 배임 여부를 다투는 일회성 법정 공방이 아니라, 한국 특유의 ‘재벌식 경영 문화’가 엔터테인먼트 산업과 만났을 때 발생할 수 있었던 필연적 명암의 부분이다.한국의 대형 엔터테인먼트 기업들은 전통적인 재벌 스타일의 수직 계열화 구조를 음악 산업에 이식했다. 모기업은 플랫폼, 글로벌 유통망, 회계, 법무 등 중앙 집중화된 후선 업무를 통제하고, 산하 레이블은 콘텐츠 생산에 집중한다. 이는 품질 관리와 효율성 극대화에 탁월한 장점을 보이며 K팝 산업의 폭발적인 성장의 밑거름이 됐다. 사실 한국형 재벌 스타일의 구조는 산업화 시대에 특유의 효율성과 추진력을 바탕으로 고도성장의 밑거름이 됐다.문제는 막대한 자본이 투입되는 모기업 입장에선 리스크를 줄이기 위해 ‘이미 성공한 공식’을 다른 산하 레이블의 시스템에 이식하려는 유혹에 빠지기 쉽다는 점이다. 이는 독립성을 본질로 하는 레이블 간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시스템과 수치를 앞세우는 전문 경영인의 ‘관리의 논리’가 아티스트의 고유성과 팬덤의 정서를 우선하는 크리에이터의 ‘창조의 논리’와 충돌하는 리스크가 충분히 발생할 수 있는 토양이 조성되게 한다. 그렇다면 이미 수십 년 전부터 거대 레이블 체제를 구축해 온 미국과 유럽은 이 자본과 창작의 관계를 어떻게 규율하고 있을까. 미국 상법과 판례법은 레이블과 아티스트(또는 모기업과 자회사)의 관계를 단순한 갑을 관계가 아닌 엄격한 ‘신뢰 관계(Fiduciary Duty)’로 규정한다. 모기업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 특정 레이블의 가치를 훼손하는 결정을 내리면 이는 신뢰 의무 위반이 된다. 특히 캘리포니아 노동법의 ‘7년 법칙(Seven Year Rule)’은 고용 계약을 최대 7년으로 제한하여, 거대 자본이 창작자를 영구적인 족쇄로 묶어두는 것을 방지하고 대등한 재협상의 기회를 보장한다.지배구조 측면에서도 글로벌 스탠다드는 한국과는 다소 다른 양상이다. 미국 기업법의 표준인 델라웨어 상법은 설령 모기업이 자회사의 지분을 절대적으로 소유하더라도, 다수 주주인 모기업이 소수 주주에 대해 엄격한 신뢰 의무를 진다고 본다. 모기업이 지배력을 남용해 자회사의 기업 기회를 박탈하거나 창의적 리더십을 부당하게 훼손하면 법원은 이를 ‘주주 억압(Shareholder Oppression)’으로 규정하고 가혹한 책임을 묻는다. “지분율이 압도적이니 이사회를 장악하고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한국식 회사법의 구조는 해외에서는 쉽게 용인되지 않는 것이다.최근 K팝 산업 전반에서 벌어지는 경영권 분쟁은, 한국 엔터 산업이 이러한 ‘성숙한 거버넌스’를 돌아볼 수 있게 하는 계기이기도 하다.K팝이 진정한 글로벌 산업으로 영속하려면 법적·제도적 프레임워크의 혁신이 필요하다. 모기업의 부당한 인사 조치로부터 레이블의 핵심 창작자를 보호할 수 있는 ‘키맨 조항(Key-man Clause)’ 역시 지속적 발전을 위해 필요하다. 그리고 모기업 인사가 이사회를 독점하는 구조를 타파해 독립적인 감시 체계를 갖춰야 한다.K팝이 전 세계인의 사랑을 받는 이유는 획일화된 시스템에 가둬진 공산품이라서가 아니라, 그 안에서 뿜어져 나오는 고유의 독창성과 사람의 열정 덕분이다. 최근 K팝 산업 전반에서 벌어지는 경영권 분쟁은, 한국 엔터 산업이 이러한 ‘성숙한 거버넌스’를 돌아볼 수 있게 하는 계기이기도 하다.노종언 변호사 (법무법인 존재) ▶저자 소개=노종언 변호사는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을 졸업하고 사법시험 합격 후 현재 법무법인 존재의 대표변호사로 재직 중입니다. 구하라,박수홍, 오메가엑스, 선우은숙 사건 등 굵직한 연예계 분쟁을 수행한 엔터테인먼트 분쟁 전문가입니다. 다수의 사건을 수행하며 얻은 현장의 경험을 바탕으로, 엔터테인먼트 법률 이슈에 대한 심도 있는 통찰을 제공합니다. 2026.03.06 06:00
연예일반

[김지욱 저작권썰.zip]㉛ ‘언더커버 미쓰홍’, ‘부산 갈매기’에 담긴 언더커버 저작권

tvN에서 인기리에 방영중인 드라마 ‘언더커버 미쓰홍’은 1997년 IMF 외환위기와 그 당시 증권가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구조조정에서 실업으로, 실업에서 극단적 선택으로 이어지는 그당시 시대의 비극과 지금 돌이켜보면 이후 IT강국으로 도약하게 되는 서막이었던 블루스크린의 PC통신까지 세기말의 여러 시대적 고증이 세세히 그려지며 화제가 되고 있는 드라마입니다.극중 증권사 여비서 고복희(하윤경)는 100만달러를 모아서 산타모니카 해변에서 서핑하며 사는 삶을 꿈꾸며 하루 하루 간신히 버텨 나갑니다. 아마도 그 시절 많은 ‘고복희’ 들에게 ‘산타모니카’는 현실을 타개할 수 있는 해방구이며, 가난을 단번에 뒤집을 수 있는, 달러가 넘쳐나는 해방구이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그런 복희에게, 서른다섯의 증권감독원 감독관이지만 스무살 고졸 신입사원으로 위장한 ‘언더커버 미쓰홍’ 홍금보(박신혜)는 “산타모니카보다 광안리가 낫다”고 말하며 복희의 희망을 무참히 깨버립니다.그 순간 흐르는 노래는 그 유명한 ‘부산 갈매기’ 입니다. ‘광안리’라는 지명과 함께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부산 갈매기’는 부산을 상징하는 노래이자 롯데 자이언츠의 홈구장 사직구장을 ‘세계 최대의 노래방’으로 만든 상징적인 응원가이기도 한, 아주 특별한 노래이기도 합니다. ◇ 노래는 멈췄고, 비난은 남았다.‘부산 갈매기’는 고 김중순 작곡가가 만든 곡을 가수 문성재가 불러 대중의 사랑을 받게 된 노래입니다. 그런데 이 노래는 한동안 저작권 문제로 사직구장에서 울려 퍼지지 못했습니다. 노래가 사라지자 일부 팬들은 노래가 사라진 이유를 가수에게 돌리며 비난했습니다. 부산에서 행사 섭외가 끊길 만큼 오해가 이어졌다고 합니다. 결국 문성재는 2023년 방송을 통해 “자신의 뜻이 아니었다”고 해명해야 했습니다. 여기에는 저작권 분쟁마다 반복되는 클리셰(cliché)가 있습니다.‘권리는 보이지 않는다. 얼굴은 보인다.’ 그래서 비난의 화살은 보통 실제 저작권 권리가 아니라, 가장 선명한 얼굴을 향하게 됩니다.가수는 그 노래를 부른 대표적인 얼굴이기는 하지만 노래의 사용 여부를 결정하는 저작권 행사 주체는 아닙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보여지는 얼굴인 ‘가수’가 가장 먼저 오해의 대상이 된 셈입니다.다행히도 ‘부산 갈매기’의 저작권을 상속받은 신동훈 작곡가는 롯데 자이언츠와의 오랜 협의 끝에 별도의 다른 조건 없이 곡 사용을 허락했고 2023년 공식응원가로 지정되며 화려하게 사직구장으로 돌아왔습니다.그러나 그 협의의 구체적인 내용과 경과는 충분히 공유되지 않았습니다. 누가 어떤 권리를 행사했는지, 어떤 조건으로 합의가 이루어졌는지, 무엇이 문제였는지는 알려지지 않은 채로 단순한 가십만 만들어졌습니다. ‘가수가 욕심을 냈구나’ 혹은 ‘저작권 대응 제대로 안했네’ 라는 불완전한 정보 속 상상과 추측은 그렇게 정설로 굳어집니다.대개 이런 방식으로 저작권 분쟁이 소모되는 이유는 바로 이 지점입니다.‘저작권 분쟁’이라는 것은 처음에는 크게 이슈가 되더라도, 대부분 판결까지 가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 보이는 얼굴과 보이지 않는 권리이슈가 되고, 감정이 먼저 앞서고, 비난의 화살은 ‘보이는 얼굴’을 향합니다. 논란이 길어질수록 ‘돈 문제’라는 프레임이 덧씌워지고, 개인이든 기업이든 리스크를 계산할 수밖에 없습니다. 옳고 그름을 떠나 이미지 훼손을 우려할 수 밖에 없는 당사자들은 대부분 합의를 선택합니다.합의는 분쟁을 끝내지만, ‘명확한 기준’은 남지 않으며, 판결이 없으니 선례가 쌓이지 않고, 선례가 없으니 유사한 분쟁은 반복됩니다. 구조는 엇비슷해도 사람만 바뀝니다. 그리고 매번 누군가는 오해를 뒤집어쓰게 됩니다.◇ 권리 행사의 정당성 VS 협상력더욱 우려스러운 지점은, 이러한 합의 중심의 종결 구조의 특성 상 ‘권리 행사의 정당성’과 별개로 ‘협상력’이 결과를 좌우하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즉 리스크를 두려워하는 쪽은 옳고 그름을 떠나 서둘러 수습하고 봉합하려 하고, 이를 잘 아는 누군가는 그 지점을 압박 수단으로 악용하기도 합니다. 결국 저작권은 창작자를 보호하기 위한 제도지만 분쟁의 대부분은 불투명한 협상의 영역으로 흘러들어갑니다. 다만 분쟁이 투명하게 기록되지 않을 때, 진실은 납득되지 못한 채 ‘보여지는 얼굴’에 대한 비난으로 귀결됩니다. ‘부산 갈매기’는 다시 사직구장에 울려 퍼지고 있습니다.그러나 그 사이 드러난 것은, 판례가 아니라 오해였습니다. 저작권의 본질보다 보여지는 얼굴의 이미지를 먼저 소비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우리 사회가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저작권은 법의 문제로 시작되지만, 정작 법적 기준은 희미해진 채 비난과 오해만 선명하게 남는 아이러니가 반복되고 있습니다. 이 과정에서 발생한 여파는 결국 다음 분쟁의 예고편이 되어, 끊이지 않는 악순환의 굴레를 만듭니다.김지욱 ㈜메이저세븐이엔엠 대표 ▶ 저자소개=서강대학교 언론대학원 석사, 현재 (주)메이저세븐이엔엠의 대표로 음악 저작권과 콘텐츠 현장에서의 음악 저작권 관련 업무 및 자문 활동을 활발히 펼치고 있다. JTBC ‘싱어게인’, 넷플릭스 ‘은중과 상연’, tvN ‘태풍상사’, ‘폭군의 셰프’, SBS ‘우리들의 발라드’, Mnet ‘보이즈플래닛’ 등 다수 프로그램 및 콘텐츠의 음악 저작권 관리 업무를 맡아오고 있다. 2026.03.02 19:39
영화

피 냄새 속에 피어난 ‘보라색 소나기’... 체인소 맨과 소나기, 슬프고도 아름다운 데자뷔 [노종언의 컬처인컬처]

전기톱 소리가 요란한 다크 판타지 만화 ‘체인소 맨’. 그중에서도 수백만 팬을 설레게 한 애니메이션 ‘레제 편’은 일본 뿐만 아니라 전세계적으로 문화현상으로 불릴 정도의 큰 사랑을 받았다. 악마와 피가 난무하는 이 기괴한 세계관 속에서, ‘레제 편’이 유독 특별한 위치를 점하는 이유는 역설적이게도 그 안에 ‘가장 순수하고 서정적인 첫사랑’ 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놀랍게도 소년 덴지와 소녀 레제의 비극적 이별은 한국 문학의 걸작, 황순원의 ‘소나기’와 깊은 정서를 공유한다. 서브컬처에 녹아 있는 클래식의 정서, 그 데자뷔가 기묘하다. 두 작품은 놀라울 정도로 닮아 있다. 두 작품의 매개체는 ‘비’다. 황순원의 ‘소나기’에서 소년은 개울가에서 소녀를 만난다. 갑자기 쏟아진 소나기는 두 사람을 원두막이라는 좁은 공간으로 밀어 넣으며 단숨에 거리를 좁힌다. 비는 두 사람을 세상과 고립시키며 그들 만의 내밀한 추억을 만들어주는 매개체다.‘체인소 맨:레제 편’에서도 ‘비’는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비를 피하기 위해 들어간 공중전화 박스, 학교 수영장에서 쏟아지는 물줄기 속의 유영. 덴지와 레제는 물에 젖은 채 서로의 체온을 느끼며, 삭막한 도시의 소음을 지우고 서로에게 집중한다.죽음을 암시하는 비극의 색채 또한 같다. ‘소나기’ 속 소녀가 좋아했던 보라색 양산은 신비로움과 동시에 죽음과 애도를 상징했다. 레제 역시 어둠 속 보랏빛 눈동자와 머리색깔, 폭죽의 잔상을 통해 덴지에게 닿을 수 없는 비극적 운명임을 예고한다. 두 소녀는 찰나의 불꽃놀이처럼 화려하게 피어올랐다가, 소년의 가슴에 흔적 없이 사라진다.이 비교의 백미는 단연 결말에 있다. 두 작품의 비극성은 ‘소녀의 죽음을 모른 채 기다리는 소년’의 무지에서 극대화된다. 소녀가 이사 가는 줄만 알고 호두를 만지며 내일을 기약하는 ‘소나기’의 소년처럼, 덴지 역시 길목에서 목숨을 잃은 레제를 모른 채 꽃다발을 들고 하염없이 카페에서 기다린다. 진실이 전달되지 못한 이 처절한 엇갈림이야말로 인류가 오랜 시간 슬퍼해 온 비극의 원형이다.잔혹한 액션물인 ‘체인소 맨:레제 편’이 대중을 사로잡은 진짜 힘은 화려한 액션이 아니라, 우리의 DNA에 각인된 ‘이루어지지 못한 첫사랑’의 애틋함에 있다. 20세기의 시골 소년이나 21세기의 전기톱 소년이나 사랑 앞에 서툰 모습은 매한가지다. 보라색 소나기가 내리던 날, 소년은 소녀를 잃었다. 그 상실의 기억은 소년을 성장시키기도 하고, 파괴하기도 한다. 20세기의 황순원이 그렸던 순박한 시골 소년이나, 21세기의 후지모토 타츠키가 그린 전기톱 소년이나, 사랑 앞에 서툰 모습은 매한가지다.비록 그 끝이 죽음과 이별일지라도, 누군가를 하염없이 기다려본 기억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 두 작품의 데칼코마니 앞에서 마음이 젖어 들 수밖에 없을 것이다.노종언 변호사 (법무법인 존재) ▶저자 소개=노종언 변호사는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을 졸업하고 사법시험 합격 후 현재 법무법인 존재의 대표변호사로 재직 중입니다. ‘컬처인컬처’(Culture in Culture)는 문화 속에 숨겨진 또 다른 문화를 성찰해 그 연결 고리를 소개할 예정입니다. 2026.02.27 06:00
뮤직

[김지욱 저작권썰.zip]㉚ 입영전야의 노래, 그리고 저작권이라는 약속

해병대 입대를 앞둔 가수 정동원이 지난 5일 리메이크 앨범 ‘소품집 Vol.2’를 발매하며 팬들에게 잠시간의 이별을 고했습니다. 어린 시절 데뷔해 대중의 많은 관심과 응원 속에 성장해 온 정동원이 입영전야를 맞이했다는 사실은, 단순한 개인의 시간이 아니라 하나의 성장 서사로 다가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의 노래를 들으며 세월을 공유해왔고, 이번 앨범은 그 시간에 대한 감사함의 작은 인사처럼 느껴집니다.이번 앨범은 변진섭의 ‘너에게로 또다시’, 김정수의 ‘당신’, 조항조의 ‘거짓말’ 등이 수록돼 정동원 특유의 따뜻한 감성을 더했습니다. 특히 실제 입대를 앞둔 청춘 정동원의 담담한 목소리로 표출된 ‘이등병의 편지’는 수십년간 세대를 아울러 입대하는 남성들의 공감대를 자극했던 그 감성을 불러와 큰 화제를 모았습니다.이 앨범은 단순한 리메이크 프로젝트가 아닙니다. 노래를 다시 부른다는 것은, 단순히 음을 내는 일이 아니라 타인의 창작 세계를 다시 건너가는 일이기 때문입니다.이 프로젝트는 (주)메이저세븐이엔엠에서 저작권 업무를 맡아 진행했습니다. 이 프로젝트에서의 저작권 업무는 어떠한 과정으로 진행됐으며 저작권에 있어 어떤 부분이 중요한지 여러분들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 저작권의 기본적 가치 - 저작인격권의 존중 그리고 소통음악을 재해석하는 ‘리메이크 프로젝트’는 종종 ‘다시 부르기’로 간단히 설명되지만, 원곡에는 이미 하나의 완성된 감성이 존재하기에 그 감성을 훼손하지 않으면서 새로운 해석을 더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은 일입니다. 소속사를 중심으로 상당한 시간을 들여 선곡작업부터 신중에 신중을 기하고, 수많은 곡들을 검토한 끝에 어렵게 선곡이 확정됐습니다.하지만 선곡이 끝났다고 해서 작업이 끝난 것은 아닙니다. 이러한 리메이크 프로젝트를 진행하기 위해서는 그 곡의 원저작자, 즉 작사가 작곡가들의 허락이 필수적입니다. 이는 단순한 이용 허락의 문제가 아니라, 원저작자 고유의 공표권, 동일성유지권, 성명표시권의 세 가지 권리를 통칭하는 ‘저작인격권’에 대한 존중의 문제이기도 합니다.저작자는 자신의 저작물을 언제, 어떻게 세상에 공개할지 결정할 권리가 있으며 자신의 작품이 본질적으로 훼손되지 않도록 보호받을 권리, 그리고 자신의 이름을 어떻게 표시할지 결정할 권리를 갖습니다.다만 이름을 표시하는 ‘성명표시권’은 금융과 같은 ‘실명제’는 아닙니다.저작자가 이명(예명)을 기재하기 희망하면, 반드시 그에 맞추어 기재해야 합니다. 이름을 적는 방식 하나에도 창작자의 정체성과 선택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이 사항은 저작권법에 규정돼 보장되는 사항으로, 실명 혹은 이명 기재 희망여부를 반드시 확인해야 합니다. 또한 저작자가 특별히 ‘이 프로젝트에서는 내 이름을 기재하지 말아달라’는 명시적인 의사표시를 밝히지 않는 한 임의로 누락할 수는 없습니다. 이번 프로젝트에서도 각 곡의 원저작자 한 분 한 분 직접 연락드려 프로젝트의 취지와 내용을 누가, 언제, 무엇을, 어떻게, 왜 부르는지로 정리해 상세히 설명드렸습니다.이 중 특히 중요한 요소는 ‘어떻게 부르는지’입니다. 이것이 저작인격권에서 보장하는 핵심 권리인 ‘동일성유지권’과 직결됩니다.멜로디를 바꿀 것인가, 가사를 수정할 것인가, 장르적 인상을 변화시킬 것인가.악곡은 3~4분 간의 비교적 짧은 시간에 표현되는 저작물의 특성상, 단어 하나 또는 약간의 멜로디 변형이라 하더라도 경우에 따라 본질적인 변화로 받아들여질 수 있습니다. 더욱이 발라드는 ‘감성’을 자극하는, 느리지만 그렇다고 처지지 않은 미묘한 템포와 구조가 핵심 요소이기에 템포가 변해 장르적 인상이 달라질 경우 이는 상당히 큰 변화로 인식됩니다.다행히 이번 프로젝트에서는 모든 원저작자들이 흔쾌히 취지에 공감해 주신 덕분에 성공적으로 진행될 수 있었습니다. ◇ 2차적 저작물에 해당되나요?이러한 리메이크 프로젝트를 이야기하다 보면, 빼놓을 수 없이 자주 등장하는 또 하나의 개념이 있습니다. 바로 ‘2차적 저작물’로, 저작권 귀속이나 매절 계약 등 저작권 관련 이슈와 맞물려 언급되는 것은 물론, 때로는 비극적인 결과를 초래하기도 합니다.2차적 저작물이란, 원저작물을 기초로 저작물이 가진 실질적인 유사성을 유지하면서도 사회통념상 새로운 저작물로 받아들여질 수 있을 정도의 수정·증감이 이루어져 새로운 창작성이 부가된 저작물을 뜻합니다.여기서 핵심적인 전제는 ‘사회통념상’이라는 기준입니다.예를 들어 원작 소설이 존재하고, 그 소설이 가진 세계관과 스토리를 기반으로 노래를 만든다거나 드라마나 웹툰을 제작하는 경우라면 이는 전형적인 2차적 저작물에 해당합니다.다만 기존에 존재하는 노래를 같은 장르 안에서 다시 부르는 경우는 보다 엄격하게 해석하고 구분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누가 들어도 원곡을 기초로 하되, 멜로디 진행을 재구성하거나 화성·리듬·구조를 상당 부분 새로 만들어서 전체적으로 ‘독자적인 음악’이라는 인상이 사회통념상 받아들여지는 경우가 전제돼야 비로소 2차적 저작물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하지만 단순히 편곡이나 편성 변경에 그친 리메이크의 경우, 2차적 저작물로 인정될 여지는 크지 않습니다. 원곡의 일부 멜로디만을 차용해 새로운 멜로디와 새로운 가사로 완전히 새로운 작품을 발표하는 정도에 이를 때 비로소 2차적 저작물로 평가되는 것입니다.저작권은 때로는 창작을 가로막는 규제로 오해받기도 하지만 본질은 그렇지 않습니다. “당신의 창작 세계를 존중합니다.” 이 한 문장을 법의 언어로 풀어놓은 것이 저작권입니다.입영전야의 노래는 결국 이별의 인사이자, 또 다른 시작을 위한 다짐입니다. 그리고 그 노래가 세상에 나오기까지는, 보이지 않는 수많은 동의와 존중의 과정이 존재합니다. 리메이크 작업은 그 노래를 만든 사람의 시간을 존중하는 것 위에 자신의 시간을 더하는 고도의 행위입니다. 이러한 존중 위에 비로소 새로운 감동이 탄생합니다.김지욱 ㈜메이저세븐이엔엠 대표 ▶ 저자소개=서강대학교 언론대학원 석사, 현재 (주)메이저세븐이엔엠의 대표로 음악 저작권과 콘텐츠 현장에서의 음악 저작권 관련 업무 및 자문 활동을 활발히 펼치고 있다. JTBC ‘싱어게인’, 넷플릭스 ‘은중과 상연’, tvN ‘태풍상사’, ‘폭군의 셰프’, SBS ‘우리들의 발라드’, Mnet ‘보이즈플래닛’ 등 다수 프로그램 및 콘텐츠의 음악 저작권 관리 업무를 맡아오고 있다. 2026.02.23 05:30
연예일반

소속사와 아이돌, 생존을 건 슬픈 투쟁..법원이 다시 쓴 ‘공존의 규칙’ ② [노종언 엔터법정]

아티스트와 소속사 간 법적 다툼에서, 최근까지 법원의 기류는 ‘약자 보호’에 가까웠다. 아티스트 개인의 인권과 직업 선택의 자유를 폭넓게 인정해 온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최근 선고된 뉴진스 전속계약 판결은 이런 흐름에 중대한 변화를 가져왔다. 기존 판례들 중 다수에서 아티스트를 약자로 보고 이들의 보호에 초점을 맞췄다면, 뉴진스 판결에선 소속사의 생존권과 절차적 정당성에 주목했기 때문이다.이 판결에서 가장 눈여겨볼 대목은 신뢰관계가 저해되는 상황이 존재하면 계약 해지가 가능하다는 기존의 판례 논리에서 벗어나, 상호 간의 갈등을 해결하려는 ‘실질적인 노력’ 이 있었는지를 전속계약 해지의 중요한 요건으로 판단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아이돌 그룹에게 자신을 발굴해 준 프로듀서나 대표는 부모와 같은 존재일 수 있다. 그렇기에 그들의 교체는 멤버들에게 깊은 심리적 동요를 일으킨다. 하지만 법원은 이 ‘심리적 동요’와 ‘법적인 신뢰 파탄’을 구분하기 시작했다.재판부는 프로듀서의 해임은 회사의 고유한 ‘경영 판단’ 의 영역이며, 이것이 곧바로 아티스트에 대한 매니지먼트 의무 위반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고 판시했다. 또한 특정 매니저의 “무시해”라는 발언 논란에 대해서도, 소속사가 CCTV를 확인하고 조사를 진행하는 등 ‘보호 조치’ 를 취했다면, 결과적으로 멤버들이 상처를 입었다 해도 소속사가 의무를 방기한 것은 아니라고 보았다.이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과거 판례에서는 멤버들이 느끼는 소외감이나 불안감은 신뢰관계 파탄의 일환으로 상당히 중요한 해지사유로 참작됐다. 이제는 소속사가 정산과 지원이라는 ‘핵심 의무’를 충실히 이행하고 있다면, 내부적인 마찰이나 경영진 교체는 계약 해지의 사유가 될 수 없다는 판단 기준이 새롭게 세워진 것이다.이번 판결에서 또 하나 주목할 부분은 ‘소속사의 생존권’ 을 명시적으로 인정했다는 점이다. 법원은 엔터 산업의 ‘하이 리스크’ 구조를 판결문에 그대로 담았다.재판부는 “소속사는 매우 높은 실패 위험을 감수하고 대규모 자금을 투자했는데, 성공한 아이돌이 단기간에 이탈한다면 회사는 회복할 수 없는 손해를 입는다”고 지적했다. 아티스트의 이탈이 곧 ‘회사의 존립 위기’로 이어질 수 있음을 사법부가 명시적으로 인정한 것이다.이는 아이돌의 ‘직업 수행의 자유’ 못지않게, 투자를 감행한 기업의 ‘존속 가치’ 와 ‘계약의 구속력’ 또한 보호받아야 한다는 사법부의 선언이기도 하다. 2주에 걸쳐 살펴본 엔터테인먼트 분쟁의 본질은 결국 ‘사람’과 ‘돈’, 그리고 ‘약속’의 문제다. 과거의 법원이 ‘기울어진 운동장’을 바로잡기 위해 인권을 침해당하던 아이돌의 손을 들어주는 것이 추세였다면, 지금의 법원은 그 운동장의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규칙의 준수’ 역시 중요한 요소로 판단되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엔터 소송은 이제 아티스트의 인격과 창조성의 영역을 넘어 계약 분쟁의 시대로 접어드는 과도기에 있다.이러한 시대적 변화를 직시하며, 소속사는 아이돌을 소유물이 아닌 파트너로 존중하고 투명한 정산과 절차를 지켜야 한다. 아이돌 역시 자신의 감정이 법보다 위에 있지 않음을 깨닫고, 계약서에 찍은 도장의 무게를 감당해야 한다.극한의 대립 끝에 남는 것은 승자 없는 폐허뿐이다. 법정으로 가기 전, 서로가 서로의 생존을 위한 필수불가결한 존재임을 인정하는 것. 그것만이 화려하고도 잔혹한 엔터 산업에서 모두가 살아남는 유일한 길이다.노종언 변호사 (법무법인 존재)▶저자 소개=노종언 변호사는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을 졸업하고 사법시험 합격 후 현재 법무법인 존재의 대표변호사로 재직 중입니다. 구하라,박수홍, 오메가엑스, 선우은숙 사건 등 굵직한 연예계 분쟁을 수행한 엔터테인먼트 분쟁 전문가입니다. 다수의 사건을 수행하며 얻은 현장의 경험을 바탕으로, 엔터테인먼트 법률 이슈에 대한 심도 있는 통찰을 제공합니다. 2026.02.20 0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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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속사와 아이돌, 생존을 건 슬픈 투쟁… 판례로 보는 엔터 산업 구조의 진실 ① [노종언 엔터법정]

K팝 산업의 성장 이면에는 늘 법적 분쟁이 존재해왔다. 대중의 사랑을 받는 스타와 그들을 육성한 소속사가 법정에서 대립하는 일은 이제 드문 일이 아니다.최근 오디션 프로그램 후 판타지보이즈 측 전속계약을 거부한 유준원, 가혹 행위 논란이 있었던 오메가엑스, 템퍼링 의혹이 제기된 피프티 피프티, 정산금 문제로 갈등을 빚은 엑소 첸백시, 그리고 경영권 분쟁과 맞물린 뉴진스 사례까지. 대상과 시기는 다르지만 전속계약 분쟁이라는 법적 다툼은 끊임없이 반복되고 있다.사람들은 “누가 배신자인가, 누가 악마인가”에 주목한다.하지만 이 싸움을 이분법적인 선과 악의 싸움으로 보기에는 복잡하고 입체적인 부분이 많다. 본질은 ‘소속사의 생존’과 ‘아이돌의 생존’이 정면으로 충돌할 수밖에 없는 엔터테인먼트 산업 특유의 ‘구조적 슬픔’에 있다. 먼저 소속사가 처한 현실을 볼 필요가 있다. 엔터산업은 흔히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 산업으로 불린다. 실상은 확률이 매우 낮은 투자를 감행해야 하는 구조에 가깝다.연습생 한 명을 육성하는 데 수천만 원, 그룹 하나를 데뷔시키는 데 수십억 원의 비용이 소요된다. 통계적으로 볼 때 10팀을 데뷔시키면 9팀은 성과를 내지 못하고 사라진다. 오직 1팀만이 살아남아 수익을 창출한다. 성공한 1팀이 벌어들인 수익으로, 실패한 9팀의 투자 비용(매몰 비용)과 회사의 부채를 감당해야 하는 구조다.소속사 입장에서 성공한 아이돌은 단순한 소속 아티스트가 아니다. 회사의 존립을 지탱하는 유일한 수익원이자, 직원들의 급여와 회사의 미래를 책임질 자산이다.그런데 수익이 발생하기 시작하는 시점에 아이돌이 계약 해지를 요구한다면, 소속사는 이를 단순한 계약 위반이 아닌 소속사의 ‘생존의 위기 상황’으로 받아들인다. 반면 아이돌의 직업적 수명은 길어야 20대 후반에 끝날 정도로 다른 직종에 비해 잔인할 정도로 짧다. 이 과정에서 아티스트로서의 ‘존엄’과 ‘인격권’은 침해받기 쉽다.그렇기에 아이돌에게 전속계약 해지 소송은 더 많은 돈을 위한 탐욕이 아니라, ‘나를 지키기 위한 몸부림’인 경우 역시 많다. 가장 안타까운 건 서로의 생존권이 충돌하는 상황에서 타협점은 찾기 어렵고, 싸움은 서로를 악마화하는 ‘제로섬 게임’으로 흐르기 마련인 점이다. 최근의 피프티 피프티, 뉴진스, 첸백시 사례 등에서 보인 격렬한 대립은 개인의 감정 싸움이라기보다, 이기지 않으면 자신의 생존이 위협받는 ‘구조적 슬픔’에서 기인한다.다음 주에는 관련 판례를 통해, 이를 판단하는 법원의 구체적인 기준과 판결의 경향을 분석해 본다. 법리적 관점에서 엔터 산업의 공존에 작으나마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노종언(법무법인 존재) ▶저자 소개=노종언 변호사는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을 졸업하고 사법시험 합격 후 현재 법무법인 존재의 대표변호사로 재직 중입니다. 구하라,박수홍, 오메가엑스, 선우은숙 사건 등 굵직한 연예계 분쟁을 수행한 엔터테인먼트 분쟁 전문가입니다. 다수의 사건을 수행하며 얻은 현장의 경험을 바탕으로, 엔터테인먼트 법률 이슈에 대한 심도 있는 통찰을 제공합니다. 2026.02.13 0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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